2025.05.30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센 입맛, 담백한 말 「味談冷」 미담랭가이드 : 맛과 여행, 담백하고 냉정하게 담습니다.

[ 포항 ] 그 골목엔 아직 동백이와 용식이가 살고 있다.

포항 구룡포에서 만나는 100년의 흔적과 드라마 속 그 거리
근대사의 기억 위에 드라마의 감성을 더한 여행, 구룡포를 걷다.

글 | 미담랭가이드

 

많은 사람들이 과매기나 호미곶 해돋이를 보기 위해 포항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조용한 이유로 이 도시에 왔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라는 작은 골목 때문이다.

드라마 한 편의 배경이 되었고, 그보다 훨씬 오래된 100여 년의 시간이 지금도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일대. 이곳은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대부터 일본인 어민과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집단거주지로 형성되었다.

당시 구룡포는 동해안 연안어업의 중심지였고, 일본인들이 선어 운반업, 통조립 가공, 수산물 무역 등을 장악하면 급속히 성장했다.

일제는 조선인보다 일본인 정착민의 어업권을 보호했고, 이로 인해 구룡포에는 일본인 상권과 생활권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일본인 목조 건물들은 1920~30년대에 걸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일부는 지금까지도 골목을 따라 줄지어 보존되어 있다.

이 거리에는 2011년부터 포항시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사업'이 추진되며, 역사자산으로서의 가치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9년, 이 골목은 또 한 번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바로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요 배경지를 등장하면서다.

드라마 속 '옥산'이라는 가상의 마을은 실제로 이 구룡포 일본인 거리에서 촬영되었고,

이후 구룡포는 관광지이자 이야기의 공간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좁고 낮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드라마 속 명장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남자당 기호 1번' 노규태의 선거 포스터, 필구가 드나들던 오락실, 백두할매 게장집까지.

드라마가 끝난 지 시간이 흘렀지만, 이 거리는 여전히 옹산의 공기와 사람 냄새를 간직한 골목처럼 살아 있다.

그 중심에는 동백이의 술집 '까멜리아'가 있다.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지만,

가게 앞에는 향미의 배달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고, 카운터에는 동백꽃빵과 까불이콘, 핑크빛 콘 아이스크림이 줄지어 놓여 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가게 직원이 전하던 익숙한 인사였다.

"오늘은 동백이가 쏩니다. 아니면 용식이가 쏩니다."

뒤편 마당을 돌아나오면 용식이 반했던 서점, 프로포즈 장면의 계단 포토존이 기다린다.

단지 구경하는 공간이 아니라, 잠시라도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듯한 경험을 주는 곳이다.

하지만 이 거리의 본질은 단순한 드라마 촬영지가 아니다.

 

대표적인 건물인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일본 가가와현 출신 하시모토 제기치가 1920년대에 지은 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선어 운반업으로 성공을 거두고, 일본에서 직접 자재를 들여와 이 2층 목조 가옥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인이 거주하다가, 2010년 포항시가 매입하여 복원한 뒤 일반에 개방되었다.

역사관 내부에는 고다츠(온돌식 테이블), 후스마(미닫이문), 도코노마(벽장식 선반) 등

전통 일본식 주거 구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근대 한일 건축 교류의 현장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 뒷산 공원으로 향하면, 용왕당과 함께 일본인들이 남긴 수많은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위에 해방 후 시멘트를 덧입히고, 지역 유공자들의 이름을 덧새긴 사연을 들었을 때,

나는 이곳이 단지 '남겨진 거리'가 아니라, 기억과 책임이 겹겹이 쌓인 역사적 공간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구룡포항에 닿았을 때,

나는 이 도시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항구도시의 생동감과, 과거의 이야기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 거리야말로 포항이라는 도시가 가진 진짜 얼굴이 아닐까.

 

우리는 때로, 사진보다 오래 남는 풍경을 걷는다.

그리고 그 골목 끝에서, 오래된 이름 하나를 떠올리고,

잠시 멈처 서게 되는 것 - 그것이 여행이다.

 

 

여행정보

  • 위치 :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153-1
  • 관람 : 구룡포 근대역사관 (10:00~17:30 / 월요일 휴관 / 무료)
  • 교통 : 포항시외버스터미널 → 200번, 200-1번 버스 이용 →  구룡포  하차
  • 함께 가볼 곳 : 구룡포항 수산시장, 과메기문화관, 호미곶 해맞이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