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담타임즈 김교환 기자 | 울산번개시장은 한때 외국인 인구로 북적이며 활기를 띠던 곳이었다. 그러나 최근 재개발로 외국인들이 떠나면서 시장은 한산해졌다. 기자가 찾은 평일 오후의 번개시장은 적막감이 감돌았지만, 그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변치 않는 서비스와 가치를 바탕으로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은 가게들. 번개시장의 끝자락, 이용 쉼터 옆에서 15년째 외국인 손님들에게 친근한 쉼터 같은 존재가 되어 준 중고 의류 매장 ‘구제나라’도 그중 하나다.
-구제나라는 어떤 가게인가요?
“저희 가게는 주로 외출복과 작업복을 판매하는 중고 의류 매장입니다. 제가 직접 무역회사에 가서 선별한 옷들만 들여오죠. 가게를 연 지는 15년이 됐고, 손님의 90%가 외국인입니다."
-외국인 손님이 90%라니 놀랍네요.
"주요 고객층은 중국, 카자흐스탄, 몽골, 베트남, 인도네시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나 유학생이에요. 중국과 몽골은 노동자 비율이 높고, 나머지 국가는 대부분 유학생입니다. 한국 손님은 10%도 되지 않죠. 좋은 옷은 대부분 젊은 학생들이 사갑니다. 베트남,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학생들은 작업복은 잘 안 사요. 울산대나 울산과학대 같은 학교에 유학 비자로 와서 공부하며 일도 병행하죠. 낯선 환경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순수하고 성실한 모습에 제 자식처럼 대해주고 싶어집니다.”
김정옥 사장은 외국인 학생들이 매장에 와서 서툰 한국어로 “학생이에요. 회사에서 일하며 돈 벌어 공부해요”라고 말할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 친구들이 메이커 옷을 보고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면 적당히 할인해 주기도 해요. 하지만 너무 자주 깎아주면 얕보일 수도 있으니 선은 지킵니다.”
-나라별로 차이가 있나요?
“손님들의 나라별 특징도 뚜렷해요. 중국 손님들은 꼼꼼하게 모든 것을 살펴봐요. 봉투를 건네줘도 옷을 다시 꺼내 입어보고, 더 나은 게 있으면 교환하기도 하죠. 옷 소매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살피는 모습에서 철저한 성격이 느껴져요. 반면에 베트남 손님들은 겉만 봐도 오케이 하고, 약간 낡아도 괜찮다며 10분 내로 구매를 마칩니다. 이런 차이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김 사장은 처음에는 중국 손님들을 다루기 어렵게 느꼈다고 한다.
“중국 손님들은 처음부터 ‘이거 새 건가요, 헌 건가요?’라며 의심부터 시작하죠. 새 옷이라고 해도 태그까지 확인하고 뒤집어 보니 처음엔 중국 사람들이 싫기도 했어요. 그런데 옷을 고르는 안목은 정말 대단해요. 디자인, 원단, 퀄리티까지 기가 막히게 고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그들의 꼼꼼함을 인정하게 됐죠.”
-가장 기억에 남는 외국인 손님은요?
“외국인 손님들은 주로 몇 명이 함께 숙소를 정해 자취하거나,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요. 회사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손님들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지만, 일하면서 공부까지 병행하는 손님들은 정말 고생이 많죠. 그들의 삶을 보면 문득 옛날 우리 농촌 생활이 떠오르기도 해요. 어렵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모습이 참 대단합니다.”
김 사장은 특히 공휴일에 외국인 손님들이 가게를 찾는 모습을 자주 본다고 한다.
“노는 날엔 자전거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거나, 시내 번화가에서 아이쇼핑을 하다가 저희 가게에 들러 쇼핑을 하곤 해요. 가끔은 시장에서 장을 봐서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관심을 보이면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는 웃으며 특별한 에피소드를 꺼냈다.
“어느 날 한 외국인 유학생이 저를 ‘장모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몰라요. 아마 누군가가 장난으로 가르쳐준 것 같더라고요. 제가 ‘장모님은 내 아내의 엄마를 뜻한다’고 설명하니 그제야 놀라면서도 웃더군요. 그 후로는 ‘이모’라고 부르더라고요.(웃음)"
-지금 시장 분위기를 보면 예전에 비해 많이 침체돼 보입니다.
"제가 처음 번개시장에 왔을 때, 울산시는 이곳을 ‘베트남화’나 ‘차이나화’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었어요. 당시엔 한 달에 두세 번씩 다문화 음식 체험 행사가 열리곤 했어요. 베트남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의 음식 부스가 번개시장을 가득 채웠죠. 외국인 인구도 2천 명 정도로 많았고, 그중 절반이 베트남과 중국 사람들이었습니다. 뒤에 있는 방들이 외국인들로 꽉 차서 빈 공간이 없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3년 전, 번개시장이 재개발 지구로 지정되면서 외국인들이 떠나기 시작했죠. 재개발로 집들이 다 철거되니까 외국인들이 갈 곳이 없어진 거예요. 결국 공장이 가까운 온산 쪽으로 많이 옮겨갔습니다.”
김 사장은 외국인들의 이탈로 번개시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말한다.
“당시 외국인들이 우리 시장을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골목마다 외국인들로 북적였고, 새벽 출근길에도 거리를 메운 사람들이 대부분 외국인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시장이 너무 조용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단골 고객들 덕분에 가게를 이어가고 있어요. 멀리 이사 간 손님들도 여전히 가게를 찾아와요. 회사 쉬는 날 옷이 정말 필요하면 일부러 여기까지 오는 거죠. 덕분에 지금도 단골 손님들이 꾸준히 매출을 올려주고 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주는 단골 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느껴요."
-많은 업종 중에 중고 의류 매장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실 저는 원래 장사를 하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30년 전부터 남편과 함께 가공업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15년 전 이 일을 시작하게 됐죠.”
김 사장은 처음 중고 의류 매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처음엔 중고품을 다룬다는 점 때문에 손님들이 이것저것 지적할까 두려웠어요. 손님들이 가게를 둘러보는 것도 불편해서 빨리 사가든지 나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컸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적응했고, 이제는 오히려 즐기게 됐습니다.”
남편의 사업 실패와 새로운 시작
사실 김 사장은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해 자영업을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우리 큰애가 다섯 살이었을 때 남편이 운영하던 ‘모나리자 화장지’ 대리점이 망했어요. 당시 모나리자 화장지는 인지도가 높았던 브랜드였는데, 남편은 돈이 들어오면 무조건 써버리는 스타일이었어요. 결국 집과 논을 팔고 부모님의 전 재산까지 날렸죠. 거기다 술과 도박까지 손을 대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남편의 실패는 김 사장에게도 큰 시련이었다.
“결혼 전에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남편은 한량에 가까웠어요. 결혼하자마자 일주일에 4일은 외박했고,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남자가 원래 그런 줄 알았죠. 하지만 몇 년 뒤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서 후회가 밀려들더라고요.”
백부님의 권유로 시작한 일
결국 김 사장은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을 깨닫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결심을 했다.
“남편 손에 들어가면 돈이 녹아날 것 같았어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일을 하려 해도 당시엔 사회 경험이 전혀 없었죠. 그러다 백부님이 기계 공장에 납품하는 걸레(‘보루’라고 불림)를 만드는 일을 권하셨습니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애들을 먹여 살리려면 뭐든 해야 했죠.”
처음엔 낯선 환경과 힘든 노동에 고생이 많았다.
“천막으로 만든 가건물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용달차로 하루에 한 차씩 옷감을 들여와 재단하고 분류하는 일을 혼자 해냈죠. 허리가 끊어질 것 같고,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꾸준히 하다 보니 일이 점점 자리를 잡았고, 거래처도 늘어났습니다."
힘든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김 사장은 보루 공장일을 시작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남편은 사업이 잘되면 또다시 옛날처럼 술과 도박에 빠지곤 했어요. 결국 생활비 한 푼 받지 못한 채 혼자 애들 급식비와 공납금을 마련하며 버텼죠. 주머니에서 몰래 돈을 꺼내 애들 학비를 대고, 남편의 무책임한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김 사장은 강한 책임감으로 가족을 지켰다.
“40년 동안 남편에게 생활비 한 푼 받은 적이 없어요. 대신 제가 직접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죠. 그때의 고통과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그때의 경험이 자양분이 되서 지금도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장사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남편의 사고와 그 이후의 삶
“올해 3월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여러 번 냈어요. 음주 운전에 무면허까지 겹쳐 결국 구치소에 세 번이나 다녀왔죠. 경찰서에서 호출이 와도 가지 않아서 매번 강제로 끌려가곤 했어요. 그런데 구치소에 잡혀가기 전에는 밥도 먹지 않고 드러누워서 죽으려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구치소에 가도 밥은 주고 병원도 데려다 준다’며 화를 내며 막말도 했습니다.”
남편은 결국 병원에 실려 갔다. 김 사장은 당뇨를 앓으며 술까지 즐기던 남편이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갔더니, 심장 기능이 19%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내장 장기들도 이미 심각하게 손상된 상태였어요. 담당 의사는 ‘이 상태로는 회복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결국 한 달 반 정도 있다가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빚과 서류더미 속에서
세상을 떠나면서 남편이 남긴 것은 빚뿐이었다.
“남편이 생전에 장사하면서 차를 수백 대 바꾸고, 그때마다 차량에 저당을 잡았던 걸 알게 됐어요. 세금도 몇천만 원이나 미뤄져 있었고, 다른 명의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폐업하면서 생긴 빚까지 합쳐 1억 원 정도 됐습니다. 제가 그동안 몰랐던 남편의 흔적들을 서류로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어요.”
김 사장은 상속 포기 절차를 진행하면서도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했다.
“기관마다 서류를 떼오라는 요청을 들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뛰어다녔습니다. 40년 동안 누적된 세금과 미납된 보험료까지 정리하니 수천만 원이더군요. 보루공장을 하면서 매출을 억 단위로 올렸는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남은 건 빚뿐이었어요.”
가게를 통해 얻은 위로
남편이 떠난 후, 김 사장은 큰 병을 얻었다.
“마음의 긴장을 놓으니 병이 찾아왔고, 우울증도 심해졌어요. 그래도 가게를 열어 사람들을 만나면 좀 나아질까 싶어 다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 손님들이 가게에 오면 너무 반가웠어요. 그들은 제 상황을 모르니까 더 순수하게 대할 수 있었죠. ‘얘들아, 안녕’ 하고 인사하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며 저도 모르게 마음이 밝아졌어요.”
외국인 손님들이 주는 에너지는 김 사장에게 큰 위로가 됐다.
“그 아이들은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밝은 미래를 가진 존재들이잖아요. 그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면 힐링이 됩니다. 돈을 모아 고향에 돌아가 결혼을 하든, 사업을 하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어요.”
새로운 손님들과의 연결고리
외국인 손님들은 그들의 친구들을 가게에 데리고 왔다. 소개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기존 외국인 손님들이 새로운 손님을 데리고 와요. 계절마다 필요한 옷이 있으니까요. 한 번 왔던 손님은 다음에는 혼자 와서 자신의 취향대로 옷을 고르곤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참 흐뭇해요.”
김 사장은 외국인 손님들 덕분에 장사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예전엔 옷이 보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지금은 이 일을 하게 된 게 정말 감사해요.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외국인들을 위해 가게를 계속 열고 싶습니다. 외국인 손님들에게 이 곳이 편안한 곳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은 기쁨에 감사하며 살려 합니다.”
15년간 ‘구제나라’는 중고 의류를 판매하는 가게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와 유학생들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김정옥 사장의 이야기는 그곳이 가진 큰 가치를 증명한다.
김 사장도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운 순간들을 겪었지만, 타국에서 온 외국인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며 위로와 에너지를 얻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구제나라’는 삶의 애환과 기쁨이 공존하는 따뜻한 나눔의 공간이었다.